현대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자본론』의 출발점은 잉여생산이라는 개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잉여생산 없이는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잉여는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지고, 축적된 자본은 산업을 탄생시킨다. 빠르게 발전하는 21세기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놀라울 만큼 잘 적용되는 이론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겨울이 추운 북반구의 많은 나라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양보다 더 생산하고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잉여생산물이 자본 축적을 촉진했고, 이는 다시 이들 국가가 부유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매우 단순한 가정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연중 따뜻하거나 더운 열대지역의 국가들은 잉여를 만들 이유가 적었다. 이런 곳에서 잉여생산은 곧 낭비가 될 수도 있었다. 식품을 효과적으로 보존할 방법이 없고 저장한 음식도 결국 썩는다면 굳이 비축할 이유가 없었다. 과일과 식물이 사방에 풍부했으므로 밖에 나가 필요한 만큼 따서 먹으면 되었다. 음식을 저장하거나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 열심히 일할 이유도 적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곳이 어떻게 낙원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필리핀 같은 열대국가야말로 현대경제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은 자연이 준 이점을 누렸을 뿐인데 오늘날에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이름이 붙고, 해외 원조를 받으며, 때로는 다소 얕잡아 보는 시선을 받는다. 따뜻한 기후 때문에 사람들이 여유롭고 명랑하며 순박해진 것을 어떻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빠르게 움직이며 세계적으로 연결된 현대경제는 필리핀 같은 열대국가의 빈곤을 더욱 가속했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필리핀은 서구 산업문명이 대량생산한 제품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 대가로 판매할 수 있는 자국 상품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수출품마저 바나나와 파인애플처럼 대규모 농장에서 공산품처럼 생산되는 작물인 경우가 많다.
한때 더 느긋한 속도로 살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현대생활의 정신없는 리듬에 내몰렸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이 올바르고 정상적인 기준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참 이상한 상황이다. 사람들은 왜 이 낯선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무시당한다. 이 현실을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잉여생산물이 부족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필리핀 음식은 대체로 신선한 재료를 바로 조리하는 방식에 기반한다. 한국의 된장이나 간장처럼 오랫동안 발효한 음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예외 중 하나는 한국의 새우젓과 비슷한 발효 해산물 페이스트인 바궁(bagoong)이다. 멸치로 만든 바궁은 기나모스(ginamos)라고 부르며 한국의 멸치액젓과 매우 비슷하다. 이를 제외하면 필리핀에서는 발효식품이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다.
필리핀은 거의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스페인 조리법을 물려받았다. 독자적으로 고유한 음식을 발전시킬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착취와 강제노동을 수반한 식민지배는 지역경제의 발전을 어렵게 했고, 이는 음식문화의 발전도 제한했다. 따라서 많은 필리핀 음식이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복잡한 음식이 발달하기도 쉽지 않았다. 저장할 필요성이 크지 않았으므로 갓 수확한 재료를 바로 요리하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필리핀에서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은 비싼 재료를 살 형편이 되지 않으며, 그런 재료에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사용한 음식도 널리 대중화되기 어렵다. 필리핀에 자연적으로 풍부한 재료조차 여러 이유로 서민이 접하기 어려워 일상적인 음식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풍부한 조개류, 알리망오(alimango)라고 부르는 맹그로브게, 울랑(ulang)이라는 대형 민물새우, 라푸라푸(lapu-lapu) 같은 고급 생선은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이 사 먹기 어렵다. 이상하게도 섬나라에 사는 필리핀 사람 가운데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많아 보이며, 생선을 제외한 해산물을 즐기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다. 필리핀에서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 수도 있다.
요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천연 재료만으로 깊은 맛을 내는 일이 의외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 생선을 물에 넣고 국을 끓여도 밋밋할 수 있다. 쇠고기를 물에 넣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의 양에 비해 재료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농도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물을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본래 재료의 맛이 크게 약해진다.
오래전 한국인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고기 한 점이나 곡식 몇 알도 온 가족이 나누어 먹어야 했다. 재료를 국으로 만들어 음식의 양을 늘리곤 했다.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은 맛을 내는 방법을 발견했다. 바로 발효의 마법이었다.
발효는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재료에는 독특한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생긴다. 발효 재료는 조금만 넣어도 국물 맛을 크게 향상할 수 있다.
한국은 춥고 긴 겨울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발효식품을 발전시켰다. 콩을 주재료로 만든 된장과 간장, 멸치액젓, 새우젓을 비롯한 여러 천연 조미료가 대표적이다. 이런 음식은 긴 겨울을 견디고 한정된 재료로도 온 가족이 나누어 먹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절박한 생존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음식은 미원 같은 현대 상업 조미료에 의존하지 않고도 깊은 맛을 내는 경우가 많다. 미원은 사탕수수를 발효해 만드는 글루탐산나트륨, 즉 MSG다. MSG는 감칠맛과 관련된 아미노산인 글루탐산의 한 형태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어 매우 저렴하며 소량만 넣어도 맛을 크게 향상한다. 미원이 요리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필리핀은 역사적으로 발효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한국 음식과 달리 된장, 고추장, 액젓 같은 전통 발효 조미료를 같은 방식으로 폭넓고 체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부 음식에 이런 재료를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필리핀 요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발효 장류와 소스가 없으면 깊은 맛을 내기가 자연스럽게 더 어려워 MSG를 흔히 사용한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음식인 아도보조차 간장과 MSG를 넣어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단순하다. 저렴하고 빠르게 음식 맛을 좋게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MSG 사용 방식은 계속 진화했다.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조미료 가운데 하나는 매기(Maggi)가 여러 가지 풍미 재료를 섞어 만든 분말조미료인 매직 사랍(Magic Sarap)이다.
거의 모든 음식에 매직 사랍을 넣는다고 말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이 맛에 너무 익숙해져서 넣지 않은 음식은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미원의 감칠맛 강화 효과에 다양한 조미료까지 더했으니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맛 폭탄’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많은 음식에 MSG와 매직 사랍을 상당량 사용하면서 필리핀 음식의 맛은 어느 정도 표준화되었다. 필리핀 음식의 일반적인 맛을 정의한다면 짜고, 달고, 강한 감칠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간장의 짠맛, 설탕의 단맛, 매직 사랍의 감칠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필리핀의 맛을 만든다.
가끔 오랜만에 외식을 하다가 음식에서 매직 사랍 맛을 알아차리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정말 필리핀에서 오래 살았구나.”
그럴 때면 약간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매직 사랍의 뒷맛이 혀끝에 오래 남는다. 마치 오래된 추억 하나를 조용히 되새기는 것처럼 말이다.
안내: 이 글은 필리핀과 한국의 음식문화에 관한 저자의 개인적인 관찰과 해석을 담은 에세이다. 지역, 가정, 개인에 따라 조리법과 조미료 사용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최종 업데이트: 2026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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